MIJIN
HYUN
PORTFOLIO
Copyright , Hyun Mijin, All rights reserved.
그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일을 모의하고 있다고 내게 진실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일의 조력자로 함께 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며, 분주하게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의 말은 음모와 농담 사이를 미끄러지듯 오가며, 우리 둘 사이에 어떤 뉘앙스를 만들어 냈다. 그는 아직 선명하지 않은 그 사건을 연신 상상하면서, 미지의 그녀가 담당할 식은 농담 같은 장면을 허공에 그려냈다. 그것은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망각 혹은 현실에 대한 부주의에 대고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툭 치고 지나쳐 보겠다는 냉소적인 음모처럼 들렸지만, 끝내 그의 실패한 농담은 현실의 진부함에 묵직한 음악적 타격감을 주면서 생경한 진동을 어딘가에 계속 일으켜 놓을 것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천장이 높은 지하의 전시 공간은 크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공간이 입구와 출구를 마주하며 연결되어 있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이 입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은
왼쪽으로 돌아 이미 문턱을 넘어 반쯤 안으로 들어가 있었고, 실내는 조금 어두웠다. 들어가서 마주하는 가장 넓은 벽은 스크린이 되어 있었고, 아직 결정되지 못한 어떤 공간의
한쪽 벽을 영상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였다. 화면을 응시하던 시선의 동선은 (이내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자각하며)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이동했고, 스크린의 상단 모서리 높이에
나란히 걸쳐 달아놓은 원형 시계가 한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큰 벽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한쪽에는 누군가가 이미 거기에 앉아 영상을 보고 있었다. 다른 한쪽의
의자는 비어 있었지만, 나는 앉지 않았다. 그리고는 몸을 다시 벽 쪽으로 돌려 강한 램프 아래 세워 놓은 수족관을 들여다 보았다. 유리 수족관의 문은 열려 있었고, 내부에는
작은 모형 암벽과 표현적인 나뭇가지와 건조한 흙이 적절한 비율의 풍경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비어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서 방과 방 사이의 연결 통로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스크린의 맞은편 크고 높은 벽에 작은 원형 초상화가 높게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옆모습을 취한 “그녀의 초상”이었다. 그가 음모와 농담 사이를 오가며 줄곧 찾았던
“그녀”의 초상화가 저 위에 걸려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빠르게 생각했다.
큰 벽 사이의 작은 연결 통로를 빠져나가니 작은 공간이 나왔는데, 어떤 책에서 가져온 마을 풍경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사진이기 보다는 인쇄물이라 말하는 게 더
낫겠다. 그게 아까부터 내가 손에 내내 들고 있던 전시 리플릿과 같은 (줄 알았으나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가는 동안 나는 그 앞에 잠깐 멈춰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출구 바로 앞에 작은 나무 서랍장이 있었는데, 맨 아래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고 내부가 녹색 빛으로 가득했다. 빛은 서랍장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안에 떨어져 있는 혹은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얇은 머리카락 한 올을 투명한 밀도로 감싸고 있었다. 서랍장 위에는 오래된 전화기가 올려 있었다. 아직 벨은 울리지
않았고, 나는 방 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출구를 빠져나왔다.
계단을 오르며 방금까지 내가 본 것에 대해 빠르게 기억을 복기해봤다. 시작과 끝을 이동해 왔으나, 시간이 몇 분 흘렀고 서로 연결된 방 두 개를 지나쳐 왔다는 것 외에
아무런 정황도 결말도 알지 못했다. 나는 밤과 같은 장소에서 내 몸이 방금 빠져나왔다는 사실 밖에 알 수 없었다. 계단 끝에서,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 너머로 큰 창에서
자연광이 들어오는 실내 공간이 보였다. 비어 있던 수족관의 유리문이 잔상처럼 눈 앞에 떠올라, 나는 내부를 (아까처럼) 들여다 봤다. 아무도 없이 비어 있는
방에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정황을 알리는 몇 개의 물건들이 적당한 동선을 그리며 배치되어 있었다. “San Francisco”라고 적힌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데, 금문교(Golden Gate Bridge)의 유명한 석양과 스카이라인을 아름답게 표현한 풍경화였다. 큰 창문 쪽으로는 화분과 틀린 그림 찾기 책이 놓여
있었다. 나는 블라인드에 가려진 빈 방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물건들을 들여다 보고 있는 나를 자각하며, 마지막에 본 틀린 그림 찾기 책에서 누군가의 농담 같은 비밀을
알아차렸다.
“아, 그녀가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더라면.”
너는 신중해야만 한다. 그러한 형상인가! 법에 따르지 않는 그것은 외현外現, apparence이다. 그것은 마치 이 장소의 한 특정 지점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다. 만일 네가 그것을 보려는 욕망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을 내팽개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지점을 가시적으로 만들 것이다. / 밤의 사유들, 언제나 더 빛나고 더 비인칭적이며 더 고통스러운 사유들. 항상 영원한 고통과 환희, 동시에 고요함.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 중에서]
다시 두 개의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어두운 방으로 내려갔다.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예상했던 대로 영상은 특별할 것 없이
그렇게 끝나버릴 것 같았다. 빈 벽을 계속 주목하다 몇 번의 중얼거림 같은 움직임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아무런 전개도 서사도 없이 영상은 계속된다. 시계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훌쩍 지나가 버린 시간을 목격한듯 그것을 말해준다. 순간, 스크린과 나와 시계 사이에 전구의 깜박거림 같이 모호한 시선이 오갔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시계가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빈 벽을 봤다. 스크린 안에 있는 빈 벽과 스크린이 된 실제 공간 속의 빈 벽을 나는 동시에 봤고, 그것은 “같음”을 중첩시키는 동시에 “다름”을 이접시켰다. 그는
아마도 내가 서 있던 자리쯤에 카메라를 켜두고 그때의 실재했던 저 빈 벽을 촬영했던 모양이다. 그 날, 이 공간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던 그 날, 그는 저 빈 벽을 향해 카메라를
세워 놓고 보이지 않는 화면의 사각지대를 서성이며 (익명의 시선을 피해) 스스로 모의했던 장면들을 옮겨놓았다.
텅 빈 영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마치 극장 스크린 맞은 편 작은 구멍 속에 위치한 영사기를 떠올리게 한 상황은, 뜻밖에도 영상을 빈 벽에 중첩/이접시키기 위한 화면 조정의
과정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보면서 이루어졌다. 이는 스크린을 비추는 광선과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나와 아무 것도 없는 빈 벽이 동시에 현존하는 순간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다는 것에 대한 생경함을 일깨운다. 볼 수 없음을 드러내며, 볼 수 없음과 마주하고, 볼 수 없음의 현존을 경험하는 일련의 상황이 벌어졌고, 그 시각적 불능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장소에 대한 수많은 회의와 의심을 계속해서 불러온다. 이 수행적인(performative) 사건은 “현상의 지각”을 일으키고 “행위의 사건”을 창출한다. 빈 벽을 비추는
텅 빈 광선을 쫓아 시선을 뒤로 돌리면 어떤 한 점에서 송출하는 빛의 (물리적) “진실”을 알게 되는데, 아무 것도 담아내지/재현하지 못한 일상의 시간들은 “참”과 “거짓” 사이를
오가며 유예된 장소 안에 놓인 “나”를 자각하게 한다.
스크린과 프로젝터를 몇 차례 왕복하던 시선은 둘이 그려내는 직선 어딘가에서 낯선 형태를 포착했다. 그것은 장소 안의 다른 것들을 관찰하던 시선 보다 한참 위에 있었는데, 작은
도마뱀이었다. 나의 행위는 곧바로 등 뒤에 있는 수족관을 향해 돌아섰고, 열려 있는 수족관의 유리문과 도마뱀을 번갈아 보면서 내가 보지 못한 어떤 사건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볼 수 없는 사건에 닿게 된 진실은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것에서 또 한 번 미궁에 빠진다. 수족관 안의 모조 풍경들로부터 이탈한 듯해 보이는 저 벽 위의 도마뱀은
잘 만들어진 모형으로 이 전시 공간에서 여느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그 가짜 형상이 저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수족관 내부의 부재를 환기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꼼짝없이 벽에 붙어 있는 도마뱀 모형과 중첩되는 또 다른 형상이 곧 포착되었는데, 나는 아까부터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텅 빈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익명의 몸이 장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다시 알아차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익명의 신체가 어쩌면 내게 이 장소 안에서의 소외를 가져다 주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닿았을 때, 원형 시계와 대구를
이루듯 마주하고 있던 원형 캔버스 안의 초상화가 시야에 다시 들어왔다. 나는 그림 속 “그녀”와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번갈아 봤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녀라고
호명된-하나(그림)는 그에 의해 또 하나(사람)는 나에 의해- 이 둘 사이에서 이미지와 실체의 간극을 헤집으며, 나는 (참인) 그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내 몸을 움직였다. 그림과
그림을 등 지고 앉아있는 익명의 신체 사이를 엿보면서 말이다.
틀린 그림 찾기가 떠올랐다. 틀린 것은 상대적이다. 원본처럼 전시되어 있는 사진과 복제되어 다수의 손에 들어간 사진들 사이에서 “틀린” 것을 찾는다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
걸까? 유일무이한 것? 다수인 것? 영원히 “틀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의 관계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 가져다 놓는다. 그 순간 그것은 “틀린 그림”으로서 참을
드러낸다.
부재와 허구를 동시에 표상하던 큰 방의 수족관처럼 출구 쪽 방 모서리에는 부재와 수수께끼 같은 허구를 상상하게 하는 서랍장이 배치되어 있다. 아까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로 녹색 빛이 반쯤 열린 서랍에 가득했고, 누군가의 머리카락도 그대로 있다. 벨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지만, 전화기는 큰 방 시계처럼 실제의 시간 속에 놓인 사물로 현실
감각을 드러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때에 울려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수화기가 들어 올려지기라도 한다면, 수화기 너머의 소리마저 익명의 신체를 타고 이곳에 와서 닿게 될 테다.
녹색 빛으로 채워진 서랍장은 어떤 미학적 순간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없는 부재의 장소를 추상적인 것으로 일련의 변환을 시도한다. 말하자면, 텅 빈 장소 안에서 추상적
사유와 사건을 견인할 임의의 역동적인 물질로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저 위 블라인드로 가려진 누군가의 방에 걸려 있던 금문교의 그림과 통하는데, 애초에 색칠 연습용 교구로 나온
밑그림에 매뉴얼대로 물감 채색을 마친 풍경화는 먼 데 있는 장소에 대한 스펙터클한 지각 보다 내 눈 앞에 펼쳐 있는 물질의 실존적인 추상성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벽에 붙어 있던 도마뱀처럼 창틀에 놓인 화분도 가짜였다. 틀린 그림을 찾기 위해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번갈아 보듯, 나는 이 장소 안에 있는 것들의 “틀린” 것들에
주목하려 했다. 그의 농담 같은 말, “그녀의 초상”이 내게서 어떤 변환을 불러오기 전까지는. 나는 그녀와 이 장소 안에서 하나의 사건을 만드는 퍼포머가 됐다. 어쩌면 내가
“그녀”였을 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머리에 가득찼다. 원형 캔버스의 초상화와 익명의 현존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엿보듯, 나는 끊임없이 이 장소를 우회하면서 “가능한 사건”을 찾고자
했다.
현미진의 작품
작가는 관람자의 신체적 움직임을 발생시키기 위해 비디오, 사운드, 동작 감지 센서 등의 장치를 활용한다. 무엇보다도 그 움직임이 놀이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작가는 전시 공간의 조건을 살펴본 후 외부적 자극을 설정하고 일상적 행위를 낯설게 경험할 장치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전시 공간뿐만 아니라 전시와 관람이라는 관습을
재질문하며 일상의 맥락에 또 다른 통로를 터 주는 기능을 한다. 작가의 장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우리의 시공간에 말하자면 슬쩍, 침입하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사람들을 웃게 하지만 일종의 옅은 허무를 간직하고 있다. 무의미해 보이지만 굳어있던 신체와 인식의 경직성을 깨닫게 해 주는 농담의 여운이 작가의 작업에 감돈다. 놀이의
방식과 우연성, 일상적 오브제의 활용은 플럭서스(Fluxus) 계열의 작품을 연상시키나 작품이 조성하는 분위기는 선명한 유머와는 구분되는 듯하다.
현미진의 작업은 관람자의 반응에 의지하지만 무방비한 설정 속에 한계 없이 작동하지는 않는다. 작품과 관람자의 대면은 일종의 균형 상태, 밸런스의 조응 관계 위에 놓여 있다.
구멍이 뚫린 물탱크를 누군가 계속해서 막아야 하는 것은 그 상태를 은유할 것이다. 구멍을 막지 못하면 전시장은 엉망이 되고, 작품은 물을 보관하는 물탱크가 제대로 기능하는가의 문제
차원에서 튀어나와 다른 작품을 해치면서 아예 ‘전시 불가’의 상태로 전시 공간을 돌변시킬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작동시키는 놀이는 함께하는 사회적 행위이기도 하다. 즐거움과 위험이 뒤섞여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평형의 상태는 사회적 약속과 신뢰의 힘이 작동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빈틈을 막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위기 관리자는 전시장의 상태를 유지할 책임을 자임한다. 현미진의 작업에서 그 책임과 중요성은 자발적 의지로 부여받고 승인된다. 양호 상태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놀이처럼 이루어진다. 그 놀이는 자신과 시공간을 공유하는 타인의 행위를 관찰하고 호기심을 가질 때 가능해진다. 공통의 한계를 가진 누군가에게 요구되는 무한한 역할과 책임을 나누어 분담하는 행위가 놀이처럼 제시되고 실행된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양태는 다양하지만 그 게임의 규칙은 있어 보인다. 규칙은 작가의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어떤 밸런스 지점을 찾는 것이다. 일상적 공간과 전시 공간의 구분선은 방문자의 움직임, 공간에 대한 그들의 관념, 그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실제 할 수 있는 것, 인간이 신체적으로 가능한 움직임의 정도 등 다양한 조건을 통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누구도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은 채 홀로 장시간 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의 설치물은 물의 흐름을 유예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순된 두 조건에서 우리는 일종의 타협, 균형점에 도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작품은 보는 이의 참여(혹은 거부)의 정도를 통해 역할의 분담과 위임이라는 일종의 심리적, 신체적 긴장을 동반한 게임을 촉발한다. 작가 특유의 느슨한 개입은 약간의 전제를 제공하면서도 큰 거부감 없이 참여자가 상황 속으로 진입하도록 이끈다. 현미진의 작업은 뚜렷한 문제의식이나 저항의 몸짓이 표면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신체적, 의식적, 생리적 반응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정도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반응이 작품과의 대면에서 작동하고, 생동하는 감각과 무뎌짐의 안락함 사이, 시소가 오가듯 밸런스 플레이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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